피어선 박사와 평택대학교 5
① 포트 스트리트 장로교회 목회(1869-1882)
피어선의 장로교 교육에 대한 관심은 복음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작용하였다. 반노예제도, 행동주의 및 낙관주의에 대한 복음주의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피어선은 올바른 지식과 기독교의 회심은 기독교 문명을 창출해 낸다고 믿었다. 기독교의 전도 및 교육, 그리고 기독교 설교에 의존한 것이 바로 미시간과 세계의 문명이었기 때문에 선교는 피어선의 교단적 활동에서 최우선 순위에 속하였다. 1877년 미시간 대회는 피어선을 특별위원회에 지명하고 대회 생활에 있어서 국내 및 외지선교회의들을 합병하도록 하였다. 디트로이트 노회의 선교비 중 큰 몫을 포트 스트리트 장로교회가 부담했는데 그것은 외지선교에 대한 교회 목사의 각성 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1877년 피어선은 장로교 총회를 대표해서 미국 회중교회전국협의회에 참석하였다. 그 때에 피어선은 제3차 전국협의회에 참석한 유일한 장로교 우정대표였다. 그 협의회의 주최측은 디트로이트 제2회중교회였다. 피어선은 협의회에 관한 보고를 뉴욕 옵서버 지에 기고하였다. 그는 에디(Z. Eddy)목사와 각급 학교에서 성서사용과 세계적 부흥운동의 지지자였던 예일대학교 총장 울시(Woolsey)의 강연을 관심 있게 취급하였다. 피어선은 콘스탄스 L. 구델(Constans L. Goodell)목사의 “시대의 종교운동의 일부로서의 여성사업”이란 제목의 강연에서 언급된 내용 즉, 여성 선교회는 “자선사업의 흐름”을 갈라놓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입장을 강되게 비판하였다.
회중교회협의회의 진행에 관한 피어선의 가장 관심 깊은 비판은 보스턴에서 있었던 무디 부흥회에 관한 헤릭(Herrick) 목사의 글에 대한 것이었다. 드와이트 무디(Dwight Lyman Moody)는 19세기 후반에 미국의 가장 위대한 부흥사였으며, 피어선은 그의 가장 가까운 동역자의 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 다 1937년에 출생하였고, 두 사람 역시 초장기 YMCA 회원이었으며, 두 사람 역시 곤경을 경험했고, 지도 면에 있어서 반대 입장에 선 인상을 주는 에큐메니칼 사상을 가진 성서적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런데 1877년에 이르러서는 무디 만이 부흥사로서의 경력을 다져가고 있었다. 그는 1873-5년간 영국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여 명성을 떨친 바 있었다. 아마도 그때까지도 무디를 만나본 적이 없는 피어선은 무디의 부흥 운동을 격찬하는 한편,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에 관한 언급이 없는 데 대해 비판하기도 하였다. 개혁교회 전통을 따르는 피어선과 그 밖의 비평가들은 무디의 메시지는 죄와 구원 설화에 관한 밝은 면 만을 취급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스탠리 군드리(Stanley Gundry)에 의하면, 무디는 하나님의 진노를 믿으면서도 ‘죄인들을 포용해서 사랑하므로써’ 그들이 예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피어선의 젊은 무디에 대한 비판은 훗날 부흥사 무디와 친근한 교분을 갖게 하는 동기가 되기도 하였다.
피어선은 그의 디트로이트 목회 기간 중 장로교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전국적 평판을 얻게 되므로 교회협력에 대한 그의 발언은 복음주의 연맹, 미시간주 기독교 대회 및 YMCA 대회 등 에큐메니칼 회집 때마다 크게 영향을 끼쳤다. 피어선은 천년왕국도래의 긴박감을 갖고 교회는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직접 부딪힐 필요가 있음을 외친 사람으로 평가할만하다. 장로교 및 교회의 일치운동에 있어서 피어선의 활동은 기독교 십자군 시대로부터 노예제도 근절에 이르기까지 그가 관여해온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기독교는 해결을 제시해야 한다고 하는 일련의 신념의 표현이었다. 1870년이 지나고 해가 거듭할수록 세계가 더욱 복잡해져가자, 아더 피어선은 광범한 사회문제에 집착하게 되었다.
피어선이 제시한 사회 병폐의 해결은 흔히 말하는 대로 복음 전파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올 마음을 가진 죄인들은 그 시대의 가중된 도의적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회문제에 대한 피어선의 해결방법은 때로 정치적이었다. 예를 들면, 절제의 법제화 및 국제적 조정에 대한 그의 지지를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사회문제들을 경제적 측면에서는 보지 않았다. 피어선에게 자선은 기독교 신앙의 결과요, 막스가 제시한 경제적 재조직은 무신론적 전제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복음의 곡해로 이해되었다.
미국 사회에 위험으로 규정한 모든 문제 중 1870년과 1880년에 가장 피어선의 관심을 끌었던 것들은 무절제와 로마 가톨릭교와 로버트 잉그솔(Robert Ingersoll)과 같은 무신론과 그리고 노동계급 및 개신교회와 관련된 전반적 문제들이었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피어선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대부분 진보적 개신교도의 마음에 얽혀있었으며, 반 노예제도, 절제 및 사회정화 등의 개혁 운동들은 수많은 남북전쟁 전 복음주의자들에게도 연관되어 있었다.
사회문제로 제기된 절제 운동은 1830년에 처음으로 강화되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 후 국가적 금주법제정과 때를 같이하여 개신교 운동으로 연속되었다. 데오도르 웰드, 테이펀 가정, 감리교의 길버트 해이븐 그리고 그 밖의 기독교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은 이전 절제 운동을 지지하고 나섰다. 개신교 목사들은 1874년에 조직된 여성 절제 연합회와 1896년에 창설된 술집반대연명의 후원 아래 세기를 통한 운동으로 계속 이끌어 갔던 것이다. 도덕적 그리고 사회적 문제인 절제는 정치적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1854년 공화당은 금주법을 옹호한다고 기염을 토했는가 하면, 절제 분위기는 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미국 사회의 진보층과 서민층을 휩싸게 되었다. 루스포드 헤이스(Rutherford B. Hayes) 및 감리교인이었던 윌리엄 맥킨리(William McKinley) 같은 절대 금주를 주장한 역대 대통령들은 백악관에서 술대접을 금하였다. 19세기 중엽까지 금주는 “문명한” 중산층 개신교 미국인의 표가 되었다. 오늘에도 금주는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일반화 되어있을뿐 더러, 경견과 근면 그리고 검소를 중히 여기는 기성 중류층과 관련을 갖고 있다.
피어선은 오래도록 금주법과 주세 인상, 기독교 여성 절제연맹 및 어린이 술퇴치운동 등을 후원하였다. 도시 빈민의 참상에 대한 피어선의 관심, 교회를 주축으로 한 절제사업의 종교적 그리고 사회적 타당성 및 문제해결의 정치적 방법의 고려 등은 그로 하여금 금주 문제에 있어서 사회복음의 진보적 편에 서게하였던 것이다. 금주운동이 개신교 성직자들에게는 새 이민자들과 노동계급집단을 사회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였다. 피어선이 보기에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 개신교회들의 입장이 소수민족은 개신교 가치관에 순응해야만 한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에 관심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1878년 5월, 피어선은 강연차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하였다. 그 때에 그는 영국, 브리스톨에 사는 조지 뮬러가 와서 어느 주일 오후 오클랜드 지역에서 강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일날 여행하기를 원치 않은 피어선은 20년 동안 줄곧 존경해온 사람의 강의를 가서 듣고 싶었지만 그 유혹을 물리쳤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피어선이 탄 중서부행 기차가 옥던(Ogdon)에 닿았을 때 뮬러씨 부부가 기차에 오른 것이었다. 피어선은 그들 부부와 함께 시카고까지 여행하였다. 시카고 체류기간 중 피어선은 뮬러씨의 강연을 듣기도 하고 포트 스트트 교회에 초청하여 설교도 하게 하였다. 뮬러는 1879년 1월 두 번째 미국여행을 계기로 포트 스트리트 교회를 방문하고 네 번에 걸친 강연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