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문준경 전도사 생애 11
1943년 성결교단이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과 동시에 증동리교회 예배당도 일제에 의해 강제 탈취되어 1,600원에 경방단에 매각되었다. 경방단은 일제가 유사시 적의 공습이나 재해로부터 시민을 지킨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였다. 이 단체는 경찰 및 소방 보조조직으로서 임무를 수행했지만, 실상은 일제의 앞잡이 역할을 했던 단체였다. 이들은 국방헌금이라고 하면서 강제로 교회를 매도케 했다.
교회가 팔리는 현실 앞에서 증동리 성도들은 피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증동리교회 건축을 위해 그렇게 노력했던 일들이 허사로 돌아가는 순간을 목격해야만 했다. 증동리교회는 성도들이 밤마다 고된 몸도 마다 않고 기둥을 세우고 기왓장을 올리는 등 갖은 힘든 노동으로 지어진 예배당이었다. 성도들은 교회 마룻장을 치고 애통하고 통곡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 교회를 다시 찾게 해 달라고 기도 소리는 이들의 눈물과 함께 메아리쳤다.
문준경 전도사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비록 예배당이 경방단에 넘겨졌지만, 교인들은 아직도 있기에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또 찾았다. 교회 사택에 모여 예배하고, 성도의 마당에서도 예배하면서 예배할 수 있는 곳이라면 함께 모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했다. 일제는 이러한 문 전도사를 못마땅해했다. 그래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문 전도사를 체포하여 혹독하게 취조하였다.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났다. 일경과 친일 앞잡이들은 걸핏하면 문 전도사를 잡아갔다. 혹독한 취조받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문 전도사의 의연한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자 일제도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문 전도사는 에스더 4장 16절의 고백처럼 “죽으면 죽으리이다”를 마음에 새기면서 반복된 취조를 견디어 내고 매번 담대히 성도들에게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그의 입술엔 찬양이 떠나질 않았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성도들은 문 전도사의 안위가 늘 걱정이 되었다. 매번 끌려가는 문 전도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무사히 다시 돌아오기만을 늘 기도했다. 다시 돌아온 날일 때는 성도들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서 문 전도사 집에 방문하여서 안부를 묻고 안쓰러워했다. 그러나 문 전도사는 오히려 자신이 성도들에게 걱정거리가 되었다며 늘 미안해했다. 문 전도사는 성도들을 위로하면서
“저 우상숭배의 잡것들은 오래가지 못할 거요.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너무나도 사랑하시어 지금 연단의 시간을 주셨는디, 이 연단의 시기 동안 우리 낙심하지 말고 쓰려지지 말고 더욱 주님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을 다 받읍시다. 우리 여기 모인 분들 다함께 기도합시다. 저 잔학한 무리가 더이상 죄의 어두움에서 헤매지 말고 빛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이 나라가 하루빨리 독립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며 기도합시다.” 라고 말하면서 약속의 말씀을 꼭 붙잡고 함께 기도했다.
나라를 위한 애국 기도는 2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기간 교인들은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나아갔다. 이러한 해방의 기쁜 소식은 증동리 교회에도 찾아왔다. 매각된 교회를 다시 찾을 기회가 온 것이었다. 문 전도사는 총회 본부로부터 받은 공문에는 교회가 매각된 계약 내용과 매각 액수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매각된 교회를 다시 찾으라는 공문이었다. 얼마나 기뻤는데, 지체하지 않고 한걸음에 마을 유지에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