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문준경 전도사 생애 13
법원의 판결에 증동리교회 성도들을 교회에서 다시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동네 유지들과 그 일당은 이 판결에 승복하지 않았다. 이들 중 ‘전순정’이라는 자와 그 일당은 교회당으로 찾아와 예배를 방해하며 행패 부리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행패에도 인내했지만, 이번에는 이곳을 훈련장으로 사용하겠다며 교회당 안에서 밥을 지어 먹고 잠을 자면서 교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나라가 해방되었지만, 이들은 일제에 의해 얻은 부를 가지고 여전히 자신들에게 권력이 있는 것처럼 동네에서 주인 노릇을 했다. 문 전도사에게는 폭언과 폭행을 일삼고, 반항하는 성도들을 구타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횡포는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문 전도사는 견디다 못해 이번에도 법원에 이러한 일을 제소하기로 작정했다. 이미 몸이 허약해져서 날로 건강 상태가 안 좋아진 상황이기에 법원에 소송을 걸고 신경쓰는 일은 건강상 무리였다. 그러나 그냥 계속 당하고만 있을 수 없는 실정에서 총회 본부(총회장 김창근)의 도움을 얻어 법정으로 담대히 향했다. ‘교회 불법 침입죄’와 ‘명예훼손죄’로 전 씨와 그 일당을 제소하고, 이번에도 목포 지방법원까지 그 먼 길을 오가면서 해야 할 일을 연약한 몸으로 감당했다. 인고의 3개월이 지나 법원의 판결문이 나오게 되었다. “전 모 씨는 7년 동안 집에서 자숙하라”는 법원의 판결문로 그 일당은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잠잠함은 표면적인 모습이었지, 그들의 속마음은 더욱 흉악해져만 갔다.
문 전도사의 건강을 제일 염려한 백 전도사는 병으로 누워있는 문 전도사를 지극 정성으로 늘 보살폈다. 누적된 피로로 그 병세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하루는 문 전도사가 백정희 전도사를 부르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겠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문 전도사는 몸이 조금 회복되자, 자신 한 말대로 자신의 관도 부탁해서 미리 짜게 하고, 수의도 손수 만들어 장롱에 보관해 두었다. 백정희 전도사는 주님의 사명자로서 언제든지 부르실 때 갈 준비하는 문준경 전도사를 보면서 그분의 종말론적 신앙을 그대로 체득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에 북쪽의 공산주의자들은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시키고자 남침을 감행했다. 전쟁 초반 국군은 속수무책으로 후퇴해야만 했고 신안군에도 인민군이 들어왔다. 그때가 8월로 이들은 섬 지역 곳곳에서 그 세력을 확장했다. 섬 지역에서 인민군은 인민해방을 외치며 자신들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거나 방해되는 사람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섬마을 사람들을 포섭하여 공산주의자로 만들고 그들과 함께 불순분자들을 가려냈다. 증동리에도 인민군이 들어와서 인민해방을 위해 왔다고 선전하며 사상검증을 시작했다. 대략 50명 정도가 무장한 채로 마을로 들어올 때, 앞서 말한 전 씨와 그 일당은 그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들은 인민군의 앞잡이가 될 생각이었다. 일제 강점기에서는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더니만, 이제는 공산주의자들과 한패가 되어서 그들의 세력을 입고 동네를 장악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교회는 자신들에게 방해물이었다. 그래서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문 전도사는 그들에게 주요 인물로 찍혀 있었다. 이러한 정황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전 씨와 그 일당은 시시때때로 문 전도사를 감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