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문준경 전도사 생애 15
1950년 9월 27일 밤, 목포로 가는 배편에는 목회자들이 한자리에 있었다. 문준경 전도사, 양도천 전도사, 이봉성 전도사였다. 이들이 끌려갈 곳은 악명높은 목포 정치보위부였다. 이곳은 사상이 제대로 검증될 때까지 갖은 협박과 고문이 자행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희소식이 들려왔다. 목포에 도착하고 알게 된 것은 국군이 남한을 다시 수복하고 북한 인민군을 몰아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인민군은 북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목포 정치보위부 사람들은 이미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차라 그곳에 사람들은 혼비백산으로 흩어지기에 바빴다. 체포해서 압송했던 군인들도 자신들의 살길을 찾아 떠나야만 했다. 자유의 몸이 된 전도사들은 목포에 은신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을 수가 있었는지 자신들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문 전도사와 양도천 전도사는 목포에 은신 중이던 이성봉 목사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들은 수소문하여 그에게 찾아갔다. 이성봉 목사는 1950년 6월 26일까지 서울 충청장로교회에서 집회를 마치고 27일에 목포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곳에는 임자진리교회 이판성 장로가 이미 와 있었고, 이봉성 전도사도 함께 있었다. 이렇게 목포에서 목회자들이 모여 그동안의 일들을 나눌 때, 이성봉 목사는 그들에게 지금은 피신하고 있을 때니 당분간 움직이지 말고 있으라는 당부했다. 이성봉 목사는 아사야 26장 20절의 말씀을 읽어 주면서 이를 강조했다. “성경에도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로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가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라고 분명히 쓰여 있지 않습니까? 중동리에 우리 국군이 들어가 공산당들을 완전히 없앨 때까지 그곳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지혜롭게 행동합시다.”
이때 문준경 전도사와 이판일 장로는 비록 그곳이 위험한 곳이지만, 다시 섬에 들어가서 사람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27세의 젊은 양도천 전도사는 생명의 위협 앞에서 이성봉 목사의 말씀을 거들며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좋다고 그들을 극구 말렸다. 그러나 이들은 양 전도사의 말을 거절하고 성도들을 더 먼저 걱정하였다. 결국 이판성 장로가 먼저 임자도로 떠나고, 문 전도사와 이봉성 전도사도 증도로 향하는 배편에 몸을 실었다.
증도에 다시 도착한 문 전도사는 이상하게도 고요하고 평온해 보였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휴식도 취하지 않고 동네에 들어가 성도들과 섬마을 사람들에게 국군이 목포를 수복해서 이제 우리 섬 지역에도 올라올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싶었다. 배에서 내려 증동리까지 가기 위해서는 대초리를 거쳐서 가야 했다. 대초리에는 집안의 작은 아버지가 살고 계셔서 먼저 그곳을 들리고 갔다.
급한 발걸음으로 작은아버지 댁에 도착하자마자, 목포에 국군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그녀는 곧장 발걸음을 증동리로 옮기려 했다. 위험한 시기임을 감지하고 있었던 작은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문준경 전도사를 집에 머무르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문준경 전도사는 자기가 지금 안 가면 증동리교회 교인과 증동리 사람들이 다 죽을 것이라며 자신의 의지를 꺽지 않았다. 그제서야 작은아버지는 남편 정근택이 소실과 함께 공산당에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정근택의 첫째 아들 태규는 해군사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전쟁을 피해 돌아온 그를 좌익들이 눈여겨 보고 체포해 죽였다고 했다. 이 말은 들은 문 전도사는 온몸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이제 국군이 들어와서 모든 것이 다시 정상화될 줄 알았는데, 빨갱이들이 들끓었던 임자도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있었다. 임자도의 임자진리교회는 60명 성도 가운데 48명이 참상을 당하고, 이판일 장로 가정은 목포에 있던 첫째 아들을 제외하고 온 가족이 순교하였다. 문 전도사하고 같이 들어간 이봉성 전도사는 자신의 고향 증동리 이기백 씨 서고에 은신하고 있었던 차에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