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선 박사와 평택대학교 11
Ⅱ. 개척지 방문 및 한국선교 (3)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이 여행은 친구들의 헌금으로 인해 갈 수 있었다. 건강이 약해졌지만, 이것이 봉사에 장벽이 되는 것은 이제껏 없었다. 더욱이 여행은 중국으로 가는 친구들과 동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건강 문제를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심지어는 의사들도 환경의 변화와 새로운 경험들이 몸의 불편을 더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소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50주년 기념일들에 그의 수중에 들어온 재정은 선교지의 필요에 도움을 줄 기회의 문을 열어 주었다.
많은 생각과 기도 후 그는 여행할 것을 결정하고, 1910년 10월 19일에 그의 아내와 딸,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 랄프워커 부부(영국 레이세스터)와 함께 피어선 박사는 밴쿠버(Van Couver)에서 일본을 향해 항해했다.
태평양을 건너는 여행은 너무 힘들어서 일행이 요코하마에 도착했을 때, 그의 딸인 선교사 커티스 여사에 의해 정해진 프로그램을 피어선 박사는 전부 이행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일을 할 목적으로 왔기 때문에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에게 단순한 관광은 아무런 매력도 없었으며 어떤 명소를 방문하자는 요청을 받을 때마다 그것이 기독교인들에게 도달하는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거나 선교의 일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다른 어떤 일을 할 시간이나 힘이 없습니다”라고 그는 말하곤 했다.
그가 본 모든 것이 그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여행과 설교에서 온 피로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에게 맡겨진 일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아오야마(Aoyama)에 있는 감리교 학교에서 강연한 후, 그는 오사카 사원을 방문하기 위해 수 마일을 여행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그는 사람들이 실제로 숭배하고 있음을 여기서 보았다. 그는 그들의 언어로 진실하신 하나님과 유일하신 구세주에 대해 그들에게 말할 수 있도록 ‘방언의 은사’를 간절히 바랬다.
그곳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극도로 피로했다. 그러나 그는 “멋진 날이었다”라고 말할 따름이었다. 우상의 신전과 대조하여 기독교 학교를 봄으로써 일깨워진 다가오는 승리의 비전은 그에게 자신이 당하는 고통도 개의치 않게 했다. 교토에서 그는 또한 혼얀지(Honywanji) 사원을 방문했는데 그곳에 대해 그는 종종 읽었었으며 글을 쓴 적도 있었다. 마치 거룩한 땅을 밟고 있는 것처럼 우상의 사당에 들어가면서 크리스천이 구두를 벗어야만 하는 것이 그에게는 아주 변칙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제일 먼저 그 일의 가장 긴급한 필요가 무엇인지를 묻고 책임을 맡고 있는 일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그에게 들어온 기금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의 더 없는 기쁨 중의 하나였다. 그는 육신의 연약함 속에서 매일 이러한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했으며 때때로 고통의 순간에 그는 이렇게 외쳤다. “이 여행은 내가 바치는 모든 것을 가치 있게 한다. 나에게 50년 동안 읽고 말한 이 일을 볼 수 있게 하고 아주 긴급한 곳에서 도움을 줄 수 있게 허락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로우신가?”
교토에서 그는 도시샤 대학과 병원, 그리고 필라델피아에 있는 그의 교회와 관련을 맺어 오고 있었던 일본 크리스천 사이키 박사의 교회를 방문했다. 의사들은 피어선 박사에게 강연하는 것과 여행하는 것을 단념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새로운 YMCA 건물이 완성되었고 축하 만찬에서 연설하라는 초청이 왔음을 알았을 때 그는 친구인 존 워너메이커에게 이를 부탁하기 위해 일어나야 함을 느꼈다.